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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입주작가 신예진 평론: 2021년 근작을 중심으로

 

자연에 의한 인간적인 선택

_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그’만의 방법

 

홍경한(미술평론가)

 

‘네 개의 질문’ 중 하나

세라믹창작센터 입주작가 4명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네 개의 방, 네 개의 질문’(2021.11.4.~2022.4.3.)을 주제로 한 전시에 작가 신예진은 족히 수백 개는 될법한 비정형의 도자작업을 선보였다. 몇몇은 탑 또는 기둥처럼 길게 천장을 향해 솟아 있었고, 많은 수의 또 다른 자기들이 모양을 달리한 채 바닥에 파편마냥 무질서하게, 혹은 나름의 질서 아래 자리했다.

작가는 이를 “어린아이가 거대한 산(山)을 올려다보며 상상했던 산의 형상”이라 했다. 유년 시절 키 작은 아이의 시선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양태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선 흡사 년차를 달리하는 나무들과 나뭇잎, 그리고 작은 돌처럼 비춰질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작품 제목조차 <나무 위에 돌 위에 나무>(2021)였으니 말이다.

설치작품 <나무 위에 돌 위에 나무>는 자연에 관한 내적 관념을 외적인 표지(Mark) 아래 구현한 것이다. 본래는 산을 구성하는 요소인 나무와 돌을 쌓은 것에서 차용한 구성이지만, 산에 관한 기억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형태의 일부라는 게 옳다. 작가는 그 나무와 돌을 단순한 입방체로 제작한 뒤 그곳에서 살고 있을 법한 생명들을 콜라주로 덧댔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건 각각의 작품 위에 자리 잡은 자연물, 즉 생명의 이미지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보건데, 재료의 차이는 있으나 도장내지는 소성한 표면 위에 자연물(다양한 식물과 곤충 나비)을 덧씌우는 방식에선 대동소이하다. 이들은 마치 나무에 앉고 돌에 뿌리내리듯 주어진 공간 내 빼곡히 또는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안착된다. 작가에 의해 명명된 영토에서 기존의 자연물들이 자라는 형국이다.(참고로 ‘UV film’으로 제작된 이 식물과 곤충 이미지는 일일이 손을 거쳐야하는 것이지만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상황에 따라 감각적으로 새겨진다.)

흥미롭게도 이 이미지들은 매우 긴밀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견실성을 뼈대로 한 자유로운 형(形)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구성과 형은 실제 형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하나의 추상처럼 다가온다.

구체적 통일의 일면성을 드러내는 추상은 공간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이는 작가가 공간마저 작품의 일부로 적극 수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공간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오래되었다. 산 속 깊은 곳에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 여긴 상상 속 생명을 ‘유리 돔’에 박제한 형태의 과거 작업은 물론, 일상 속 공간까지 조형으로 삼은 근래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공간을 다루는 영역도 좁지 않다.

2021년 DMZ문화예술삼매경의 일환으로 진행된 고성 아트호텔 리메이커(ART HOTEL: Remaker)에서 선보인 아트룸 <산수설계 프로젝트> 등에서도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나아가 얼마 전 전시기획자 장민현이 기획한 전시 ‘도시의 형(形) 위에 빚는 상(Image)(2021.11.10.~11.30)’에서 역시 공간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 뒤 그 공간 속으로 적극 개입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중 지난 6월 사업이 종료됨과 동시에 선보여 현재까지 많은 관람객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산수설계 프로젝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자연의 모습이 아닌, 보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법한 미지의 세계를 DMZ와 결부시켜 녹여낸 아트룸(art room)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생태를 실제 사용 가능한 객실로 옮긴 이 작품은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자연의 모습과 일상 속 자연과 예술의 조화 등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궁극적으론 인간과 자연의 공생 및 새로운 자연체계에 대한 상상이 배어 있다.

이 아트룸에도 신예진의 공간성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의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비계와 훗날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시에도 출품된 오브제 및 조명, 패턴화, 여러 식물 등도 함께 한 자리를 차지했고, 프레임에 가둬진 자연의 모습 등의 평면 작업 역시 설치됐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끈 건 아트룸 공간을 자연화 하는 데 크게 일조한 비관다발식물인 이끼류였다.

이끼류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끼는 자연생태계의 발원에서부터 유지에 이르는 중요 요소이면서 동시에 자연성의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작가의 미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소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과 영양분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아가는 이끼는 그늘지고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자연 속에서 공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일종의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로써,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유무형의 요소들을 자원으로 삼듯, 이끼는 인간이 배출한 오염된 공기와 수질은 물론 인간이 내뱉은 다양한 불순물마저 흡수해 스스로 자족하는 ‘자가-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다.

오토포이에시스와 함께 척박한 환경에 가장 먼저 정착해 다른 식물의 터전을 제공한다는 점도 작가가 이끼를 재료로 삼은 이유다. 실제 이끼는 성장하면서 부식토(腐植土)를 생산하고 이 부패-분해된 토양으로 인해 여타 식물들이 뿌리내릴 수 있다. 이처럼 이끼는 자연친화적인 생명이면서 다른 동식물에게 훌륭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그자체로 본질의 자연에 가깝다. 본질의 자연은 신예진이 추구하는 세계이다.

<산수설계 프로젝트>는 작가가 머릿속으로 그려온 미래의 모습을 자연에 빗대어 담아낸 것이기도 하지만, 공간자체를 거대한 생명에너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탈바꿈 시켰다는 것에서 주목의 이유가 됐다. 자연의 시각에서 공간을 직조했다는 점, 생명의 꿈틀거림이 인간 삶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 등도 눈여겨볼 이유다. 물론 인간의 편의를 지향하는 장소를 자연이 지배하는 형국으로 치환하여 표현한 그의 예술적 상상력도 아트룸 <산수설계 프로젝트>를 말하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부분과 전체의 합: 신예진의 공간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인 프랙탈(fractal)처럼 공간에 대한 탐닉은 김해 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에서의 전시 ‘New Face & Artist’에서도 되풀이 됐다.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진행된 해당 전시에 신예진은 자연의 거대함을 증명하듯 (자연을 상징하는 매개체인)대형 나비와 벽면을 가득 채운 패턴 벽지, 기계부품과 결합된 형태의 자연 이미지, 인공성이 자연물을 보호하는 양태를 한 작업들을 내걸었다. 이밖에도 조감도 형식의 설치 작업과 완성된 자연 도시의 마천루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 등을 하나의 공간에 병치했으며, 크리스탈 레진으로 쌓은 어떤 것은 뾰족하게 또 다른 것은 도시계획에서나 나올법한 도식에 자연물이 엉겨 붙은 형국으로 묘사했다.

이뿐 아니라 작가는 공간 전체에 도면 양식에서 빌려온 구조물을 비계로 된 선(線)의 형태로 구현했다. 여기서 선은 일차적으론 도시적이고 물리적인-그러면서도 규정적 개념 등의 모든 도식화된 것들을 대리하지만, 자연에 의한 구조화와도 연계된다. 비계의 선과 다양한 형식의 작업이 하나로 따로 또 묶이는 조합은 일상에서 외면해온 자연을 쓸모 있는 것으로 재생산해 현실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고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역으로 자연에 의한 초-미지의 영역을 새롭게 설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궁극적으론 자연 스스로 구조를 창출하는 공간이 된다.)

재밌는 사실은 수십~수백의 식물과 나비, 그리고 규칙적 혼돈을 불러오는 작품들은 인간과의 관계성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한 탓에 관람객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상당한 리얼리티와 작가적 상상이 접목된 작업이 관자들에겐 원형의 체험으로부터 비롯된 경각심을 심어주니 응당 가능한 현상이다. 이를 두려움으로 표현해도 무리는 없다.(그 두려움은 낯섦에서 촉발한다. 일례로 자연 속 개체들이 기계문명을 활용하거나 결합된 장면을 우린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더구나 평면작업을 비롯한 오브제 설치와 작품 내 포함된 발포 우레탄과 필름 이미지, 에폭시 마블링 등의 세세한 장치들은 서로 다른 긴장감과 조화로움으로 단일한 조형성을 벗어나도록 하며, 공간은 수많은 개체들이 생명력을 잇는 둥지 내지는 구석구석에 산발 배치됨으로써 생명의 무한 확장성을 읽게 한다.)

어쨌든 “디스토피아적인 시선으로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있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반추해보는 계기”와 함께 인간 공존방식의 전환을 도모한 이 작업에서 또한 공간은 그의 주요 조형언어로 자리했다.

이후 진행된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시는 윤슬미술관 전시의 연장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연 재개발에 따른 숱한 개념의 파생, 즉 자연과 도시,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집단과 개체, 개발과 보존, 자연스러운 것과 계획적인 것 등의 관계성을 말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도 계승됐다. 여기서 또한 전개도와 청사진 등 건축물의 설계도면방식을 빌려 작가가 상상하는 자연의 이면, 이상적 풍경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

자연의 본연과 인간에 의한 침탈의 상황을 추상화한 신예진의 작업에서 시대성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장소가 개입되면 그 시대성을 포박하는 사회성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도시의 형(形) 위에 빚는 상(Image)’은 꼭 언급해야할 전시다. <산수설계 프로젝트>처럼 삶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인간과 사회,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 눈에 띄는 작업이자, 작가만의 감각을 통해 자연이라 불리는 생태 내 인간과 사회를 독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 학성동 ‘희매촌’에 자리 잡은 옛 성매매업소를 무대로 한 그의 작업은 재개발로 인한 황폐화와 그로부터 획득하게 되는 자본, 실용주의에 의해 무너지는 인류의 미래가 자생하는 자연과 맞물린 무대다.(이 무대는 역사적으로 과거엔 많은 이들로 번잡했던 곳이지만 현재는 재개발로 인해 폐허가 된 곳, 사람들이 빠져나가 다시 자연이 자라나고 있는 곳, 재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사라질 자연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희매촌’ 내 옛 성매매업소에 <우리도 같이 살아요>(2021)를 명제로 한 작품을 설치했다. 다 쓰러져가는 폐가(심지어 비가 내리면 온통 물바다가 될 만큼 관리되지 않은 곳이다.)에 기존 자연물 드로잉 및 오브제 설치작업을 들여놨으며, 좁은 몇 개의 방은 제의(祭儀)하듯 꾸몄다. 직선으로 된 구조물을 만들고 곰팡이와 이끼로 가득한 벽면에 보이지 않는 생태를 조성했다.(사실 조성했다고 표현하기 보단 본래 그곳에 자리 잡은 생명들이 보다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하고, 그 생명들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축제의 장을 열어줬다는 게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인지 작가는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조명, 음악도 넣었다.)

대신 인위성은 최소화 했다. 비규정적이고 시공간적 경계 없는 집합적인 자연,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존재에 인간이 침투하는 방식은 절제했다. 쉽게 말해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본질을 살피면서 회귀, 포용의 미학을 자연에 결부해 예술언어로 끌어낼 수 있도록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살렸다.(여기서 중요한 건 낡은 것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밀려나지 않기 위한 자연물에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의식을 덧대면서 시간이 묻어 있는 생명들을 기꺼이 존중했다는 점이다.) 이를 달리 보면 “자연의 내면으로 (보다 깊숙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결과 문명 속에서 자가발전을 거듭해온 자연/ 생명은 타자 간 거리감을 상쇄하는 치유와 화합의 단어들을 생성했다. 그러자 물리적 공간에 갈등과 대립이 아닌 자연 친화의 실현이 나타났으며, 반위계적이고 반권위적인 층위에서의 수평적 관계가 구축되었다.

<우리도 같이 살아요>는 생물이거나 무생물이거나, 물질이거나 비물질이거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독립적이거나 공동체적이거나, 형식이거나 본연에 관한 것이거나 아무튼 그 모든 것은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 그 관계 맺음을 현장에서, 실질적-현실적이면서도 지적으로 드러낸 사례가 바로 <우리도 같이 살아요>이다.

<우리도 같이 살아요>에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예의 추상성, 즉 특정한 존재자들로부터 받아들인 관념들이 같은 종류의 모든 존재자의 일반적인 대표물이 되며, 그들에게 명명함으로써 관념에 상응하여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장소 특성상 예술이 그자체로 목적 화되는 것보다 예술적 감수성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 내지는 건강한 생태윤리로 확장시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도 같이 살아요>에 변별력을 부여하는 요인이다. 인간과 자연환경에 관한 관계를 고지할뿐더러 ‘인간에 의한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동일한 선상에 놓일 수 있는 탓이다.

<우리도 같이 살아요>는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단출하면서도 힘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힘은 자연이라는 명사가 어떤 법칙에 의해 변화하고 관계 맺는지에 관한 자문에서 출발하며, 생태계 내에서 존재하는 어떤 알 수 없는/불가역적 힘에 의해 생성되는 불균형의 균형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원자들의 집합-관계를 다룸으로서 드러난다. 또한 인간에 의해 소멸되어가는 자연생태계가 치유되고 바뀌어 달라질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신예진의 공간작업 <우리도 같이 살아요>는 인간의 눈으로 해석한 폐허 속 ‘자연의 실제 모습’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주의를 쉼 없이 오가며 우리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냐고.

 

자연에 의한 인간적인 선택

2017년 독일 뮌스터프로젝트(Sculpture Projects in Münster)에서 선보인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After A life Ahead>는 오래 전 폐관한 아이스링크를 거대한 생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작품이다. 작가는 링크장의 콘크리트 바닥을 파내어 진흙 덩어리 같은 여러 개의 벌집 조형물을 설치하고, 가늘고 긴 실개천형태의 수로를 만들었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보존된 바닥엔 네모진 어항을 설치했으며, 이 안에는 청자고둥류(Conus Textile)와 유전자조작으로 만든 인공 관상어 글로피시(Glo Fish)를 넣어 두었다. 특히 어항 내 함께 배양시킨 헬라세포(HeLa cell)는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자연물들과 병치되며 인간과 환경, 자연 간 필수불가결한 논의를 촉발했다.

이 작품을 통해 피에르 위그는 건축, 토목, 생물학, 지형학 등 다양한 학제적 상관성을 되물으며, 자연의 정화력과 치유력, 자연의 위대한 회복력과 인류와의 공존을 강조했다. 나아가 몇몇의 생물(청자고둥류와 글로피시, 헬라 세포 등)을 기호로 인간문명의 허구성을 파헤쳤으며, 거대한 발굴현장 같은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인간에 의한 환경이 가져올 파국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기술(記述)은 당시 많은 관람객에게 깊게 각인됐다.

신예진의 작업 역시 생물학, 사회학, 도시학 등의 다양한 장르‧학제적 연광성을 통해 ‘자연의 정화력과 치유력, 자연의 위대한 회복력’, 인류와의 공존을 강조한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존재 방식 혹은 예술적 행동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연의 역설적인 모습을 상상해 현대 도시가 자연에게 행해온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의 도시계획형태를 되짚어볼 뿐만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자연의 모습에 귀를 기울이며 경계 없는 조형방식과 특유의 감각을 통해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을 다른 차원에서 제시한다.

이와 같은 흐름은 사라져가는 도시와 자연의 모습을 동일시하고 새로운 가치를 위해 대체되는 도시 및 자연에 대한 현재의 방법론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그동안의 질문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인간중심주의에서의 자연에 대한 고찰 등을 함께 고민해 보길 기대해온 일련의 전시와 작업에서 익히 확인된다.

그 중에서도 신예진의 작업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인간중심주의에서의 자연에 대한 고찰은 동시대에 있어 중요한 이슈다. 우린 통상 환경을 말하면서도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환경임을 간과한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환경은 ‘주변’으로 설정된다. 아니, 환경이란 단어는 처음부터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우월의식이 내재되어 있으며, 인간에 의한 의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환경에 그친다. 이러한 논리는 자연이라는 환경에 가해지는 거대한 침해사례를 보면 뚜렷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자신들의 환경에만 신경 쓸 뿐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병든 지구를 위해 우린 어떤 공동체적 협의도 구조도 대안도 내놓지 못했으며,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 치유를 위한 어떤 무대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자연이 선사하는 안심의 거처란 이뤄지지 못한 채 어떤 면에선 스스로 박찬 지점도 있다. 그렇게 우린 자연과 환경, 도시의 인공성과 여러 가짜들을 말하면서 진짜 삶의 문제는 소홀했다. 자연이 질서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사실은 인간 탐욕의 결과임을 애써 부정해왔다.

사회 생태주의의 개척자인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주장처럼 자연환경 및 생태문제는 사회문제임을 도외시한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신예진의 목소리는 단지 자연과 환경이라는 단어에 갇힌 인간의 이기주의를 성찰함을 넘어 추상성에 불과한 자연윤리규범이 어떤 방식으로 재고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미학적 서술이다.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조형언어를 통해 차후 세대에 대한 생태적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공생공존이 허구에 멈출 것이 아니라 변화를 염원한 실질적인 실천윤리, 생태중심의 생태윤리에 다가서야함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자연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다행히도 가공의 환경을 물리친 채 자연생명의 순수성을 예찬하는 방향에서의 역설과 인간에 의한 왜곡과 변질 등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오버랩 한 신예진의 작품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료히 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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